後漢書 [뉴스 속 후한서] “자네의 뇌물은 하늘이 알고 땅이 안다”(주간동아) 2010/03/28 20:55 by 마왕

<주간동아>에 [이영철 교수의 5분 한국사]라는 고정 칼럼이 있습니다. 이번 주에 다룬 것이 최근 교육계를 들썩이게 한 서울시 교육청 뇌물 사건입니다. 이들의 한심한 작태를 [후한서]에 나오는 양진의 일화와 대비시켜 다루고 있습니다. [후한서]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아주 길고 상세히 소개합니다.



중국 위진남북조시대 송(宋)나라 역사학자 범엽(范曄, 398~446)은 상서이부랑(尙書吏部郎)의 관직에서 선성태수(宣城太守)로 좌천되면서 역사 연구에 몰두, 10여 년 각고의 노력 끝에 ‘후한서(後漢書)’를 편찬했다. 건무(建武) 원년(서기 25년) 광무제(光武帝) 유수(劉秀)가 후한(後漢) 정권을 세운 후부터 건안(建安) 25년(서기 220년) 헌제(獻帝) 유협(劉協)이 조비(曹丕)에 의해 폐출될 때까지 후한 196년의 역사를 기술했다.

그가 비록 지부(志部)를 완성하지는 못했으나 본기(本紀) 10권, 열전(列傳) 80권의 이 기전체 역사서는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 반고(班固)의 ‘한서(漢書)’와 더불어 중국의 ‘삼사(三史)’로 꼽힌다. 문장이 유려하고 설명이 적확하기로 유명해 후한의 역사서 중 제일로 평가받고 있다.

특히 그는 열전에서 문원(文苑), 열녀(烈女), 술사(術士), 일민(逸民), 독행(獨行), 당고(黨錮), 환관(宦官)의 일곱 가지 새로운 전(傳)을 첨가해 독특함을 더했다. ‘후한서’ 권54의 ‘양진열전(楊震列傳)’을 펼치면 강직한 한 관료의 ‘4지(四知)’에 대한 아름다운 내용이 소개돼 있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사기], [한서], [후한서]만 이야기할 때는 삼사(三史)라고 하고 여기에 진수의 [삼국지]를 더하면 사사(四史)라고 합니다. 굳이 따지자면 [후한서]가 건무 원년(25년)에서 시작하는 것은 아닙니다. [광무제기]를 보면, 광무제의 조상들과 어린 시절 일화들을 간략하게 소개한 후, 신나라 왕망의 연호인 지황(地皇) 3년(22년)에서 시작합니다. 이때 천하에 황충과 기근이 들면서 뭇 영웅이 봉기하여 신나라의 짧은 명운이 끝나기를 재촉합니다. 광무제 유수도 이때 친척, 지인들과 함께 남양군 신야현에서 군사를 일으킵니다. 끝나는 것도 건안 25년(220년)이 아니라 위나라 조비에게 나라를 잃은 후한의 마지막 황제 헌제의 증손자인 유추(劉秋)가 오랑캐들에게 살해당해 봉국(산양국)이 없어질 때까지(310년 경)를 다루고 있습니다. 하지만 대체적으로 볼 때 광무제에서 헌제까지 후한 196년의 역사를 다루고 있는 것이 맞습니다. 



후한 제6대 안제(安帝, 재위 107~124) 때의 관료 양진(楊震)은 자(字)가 백기(伯起)다. 관서(關西) 출신으로 어려서부터 학문에 전념해 박학다재하고, 인격이 출중하며 청렴결백해 ‘관서의 공자(孔子)’라는 칭송을 받았다.

양진이 동래군(東萊郡) 태수로 임명됐을 무렵의 일이다. 그가 임지로 떠나던 중 날이 저물어 창읍(昌邑·현재 산동성 금향현)의 어느 객사에 머물게 됐다. 객사에서 혼자 이런저런 상념에 잠겨 있는데 창읍현 현령인 왕밀(王密)이 밤늦게 찾아왔다. 왕밀은 양진이 형주(荊州)에서 자사(刺史·감찰관)로 있을 때 알게 된 사이였다. 그때 그의 학식과 재능을 아껴 천거해준 바가 있었다. 즉 양진은 왕밀의 출세길을 열어준 은인인 셈이었다.

오랜만에 만난 두 사람은 밤이 깊어가는 줄 모르고 지난날의 얘기를 나누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그러던 중 왕밀이 슬며시 옷깃에서 황금 열 냥을 꺼내 공손하게 양진의 무릎에 올려놓았다. 왕밀은 그동안 양진의 보살핌에 대해 약소하지만 성의로 알고 거둬주기를 간청했으나 양진은 부드러운 음성으로, 그러나 엄중한 표정으로 거절했다. 왕밀은 뇌물로 드리는 것이 아니라 베풀어준 은혜에 대한 보잘것없는 보답이라 생각하고 거둬주기를 거듭 간청했으나 양진은 두 눈을 부릅뜨면서 “나는 옛날부터 자네를 알고 있고, 자네의 학식과 인물에 대해서도 확실하게 기억하네. 자네는 내가 짐작했던 바대로 출세를 해 현령 벼슬에 올랐네. 앞으로도 직무에 충실하여 영전을 거듭할 것을 의심치 않네. 그러니 나에게 보은이라면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은가”라고 말하며 거절했다.

그러나 왕밀은 집요하게 “아니올시다. 그렇게 냉정하게 말씀하시면 제가 너무나 섭섭하고 부끄럽습니다. 게다가 이 밤중에 방에는 태수님과 저 두 사람밖에 없지 않습니까. 오직 태수님 한 분에게 이 사람이 올리는 것이니 옛정으로 너그럽게 받아주십시오”라고 말했다. 그러자 양진은 똑바로 왕밀을 쏘아보며 “자네와 나 두 사람뿐이니 아무도 모른다는 말인가. 그러나 하늘이 알고 땅이 알고, 그 다음에 자네가 알고 또 내가 아네(天知 地知 子知 我知 何謂無知)”라며 단호히 거절했다. 왕밀은 얼굴을 들지 못하고 물러갔다. 그 후 양진의 청렴고결한 언행은 더욱 확고해졌고, 널리 알려져 군사관계 최고책임자인 태위(太尉) 지위까지 올랐다.



이 이야기는 뇌물 관련 이야기나 청백리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거의 언급될 정도로 워낙 유명한 일화이다. 글쓴이 말대로 양진은 관서(함곡관 서쪽 지방을 말한다.) 사람인데, 정확히 말하면 홍농군(弘農郡) 화음현(華陰縣) 사람이다. 집안은 대대로 학문을 통해 입신하고 이름을 떨쳐 한나라 조정에서 벼슬했다. 원문을 살펴보자. 


양진은 자가 백기(伯起)이며, 홍농군(弘農郡) 화음현(華陰縣) 사람이다. (중략) 양진은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했다. 태상(太常) 환욱(桓郁)에게서 구양가의 『상서』를 배웠는데, 경전에 밝고 널리 읽어 궁구하지 않음이 없었다. 이에 여러 유생들이 그를 일컬어 말하기를 “관서(關西)의 공자(孔子) 양백기(楊伯起).”라고 했다. 호현(湖縣)에서 빈객으로 살면서 주군에서 예를 다해 불러도 답하지 않기를 수십 년이었다.1) 뭇 사람이 그에게 저물었다[晩暮]고 했으나 양진은 뜻을 더욱 굳혔다.

후에 황새[冠雀]가 드렁허리[鱣魚] 세 마리를 물고 강당 앞에 날아와 모였다. 도강(都講)이 물고기를 잡아 바치면서 말했다.

“사전(蛇鱣)이란 경과 대부의 옷 모양입니다. 숫자가 셋인 것은 삼태성(三台星)을 나타냅니다. 선생님께서는 나중에 여기까지 오르실 것입니다.”2)

나이 쉰 살에 비로소 처음 주군에 출사했다. 대장군 등즐(鄧騭)이 양진의 현명함을 듣고 불러서 무재(茂才)로 천거한 후, 네 번이나 승진시켜 형주자사(荊州刺史)를 거쳐 동래태수(東萊太守)에 임명했다.

양진이 동래군으로 가는 길에 창읍현(昌邑縣)를 지나게 되었다. 창읍현령은 예전에 형주에서 무재로 천거한 바 있는 왕밀(王密)이었다. 왕밀은 양진을 알현한 후 밤이 되자 황금 열 근을 품에서 꺼내 양진에게 주었다. 양진이 말했다.

“옛 친구(양진 자신)는 그대를 아는데, 그대는 옛 친구를 모르니 어찌된 일인가?”

왕밀이 말했다.

“밤이어서 아는 사람이 없습니다.”

양진이 말했다.

“하늘이 알고, 귀신이 알고, 내가 알고, 그대가 아는데 어찌 아무도 모른다고 말하는가!”

이에 왕밀이 부끄러워하면서 물러났다.

얼마 후 [양진은] 탁군태수(涿郡太守)로 옮겼다. 성품이 공평하고 청렴했으며, [아랫사람을] 사사로이 만나지 않았다.


1) 『속한서』에 따르면, “가르침을 내린 지 이십여 년 만에 주에서 불러들였으나 몇 차례나 병을 칭하면서 나아가지 않았다. 어렸을 때 아버지를 잃고 가난해져 홀로 어머니와 더불어 살았는데, 땅을 빌려 씨 뿌리고 농사를 지어 어머니를 봉양했다. 일찍이 뭇 유생들이 쪽을 심는 것을 도우려 했으나 양진이 번번이 뽑아 버리고는 그 후에는 다시는 가까이 하지 않으니 향리 사람들이 효자라고 칭송했다.”

2) 관(冠)은 음이 관(貫)이다. 즉 황새[鸛雀]를 말한다. 전(鱣)은 음이 선(善)이다. 『한비자(韓非子)』에 따르면, “전(鱣)은 뱀과 비슷하게 생겼다.” 신 이현이 아룁니다. 『속한서』 및 사승(謝承)의 『후한서』에는 ‘전(鱣)’이 모두 ‘선(鱓)’으로 되어 있습니다. 옛 글자에서는 ‘전(鱣)’과 ‘선(鱓)’이 서로 통합니다. 드렁허리[鱣魚]는 길이가 세 자에 지나지 않는데, 누런색 바탕에 검은 줄무늬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도강(都講)이 “사전(蛇鱣)은 경과 대부의 옷 모양이다.”라고 한 것입니다. 곽박(郭璞)에 따르면, “전어(鱣魚)는 길이가 두세 길로 음은 지(知)와 연(然)의 반절이다.”라고 했지만, 어찌 황새가 두세 길이나 되는 물고기를 이길 수 있겠습니까? 이는 선(鱓)이 분명합니다.



원문의 인용은 대체로 그 뜻은 정확하지만 그 표현은 심하게 극화되어 있다. 이럴 때 조심해야 할 것은 재미있게 표현하려다가 원문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양진은 장회태자 이현의 주에서 보이듯이 젊은 날에도 남한테 일체의 폐를 끼치지 않고 살아온 청렴한 선비였다. 왕밀과 만나는 부분에서도 이러한 그의 성격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이 글의 백미는 사지(四知)일 터인데, 이 부분의 인용이 잘못되어 있다. 글쓴이는

하늘이 알고 땅이 알고, 그 다음에 자네가 알고 또 내가 아네(天知 地知 子知 我知 何謂無知)

.”라고 했는데, 원문에는 “하늘이 알고, 귀신이 알고, 내가 알고, 그대가 아는데 어찌 아무도 모른다고 말하는가(天知, 神知, 我知, 子知. 何謂無知)

!”라고 되어 있다. 이는 후대의 어떤 글에서 잘못 인용되어 그대로 굳어진 탓으로 보인다. 옥의 티쯤 될 것이다. 

그런데 역사의 아이러니라고나 할까. 이처럼 청렴결백했던 양진의 후손 중에 바로 후한을 거의 멸망에 이르게 한 극악한 인물 양기(梁冀)가 나온다. 양기는 권력을 잡은 후 자신의 이득을 위해 황제를 독살한 탐관오리의 전형으로 수많은 반대자들을 탄압해 죽음으로 몰아넣은 중국 역사상 최악의 인물 중 하나로 평가되는 사람이다. 그러고 보면 자녀 교육, 정말로 중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