後漢書 [책 속의 후한서 2] 곽철환, 시공불교사전(시공사, 2003)에서 2010/03/03 02:37 by 마왕

곽철환 선생의 [시공불교사전]은  딱딱한 불교 용어들을 우리말로 쉽게 찾아볼 수 있게 한 책이다. 중국의 후한 시대는 서역에서 불교가 처음으로 전파된 시기이다. 그런데 기록이 충분하지 못하고 아직은 널리 퍼지지 않은 탓인지 그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이 사전에서 [후한서]에 대한 부분은 단 한 줄로 처리되어 있다. 

신회(神會) 684-758. 당(唐)의 승려. 호북성(湖北省) 양양(襄陽) 출신. 
후한서(後漢書)를 읽고 불교를 안 후 출가함. 

신회는 혜능의 제자로서, 육조 혜능을 중심으로 삼아 남종선의 자리를 확고히 한 스님이다. 그렇다면 [후한서]는 불교를 어떻게 기술하고 있을까. [후한서]에는 불교 관련 언급이 모두  여덟 군데 나온다. 이를 차례로 살펴보면, 중국 불교의 탄생을 들여다보는 재미를 느낄 수 있다.


전사(前史)1)는 환제가 음악을 좋아하고 거문고와 생황을 잘 탔다고 칭송했다. 방림(芳林)을 꾸미고 탁룡궁을 완성했으며[考]2) 화려한 차양을 설치해 부처[

浮圖]와 노자를 제사지냈으니3) 이것이 이른바 “귀신의 목소리를 듣는다.”4)라고 한 것이 아니겠는가!


1) 『동관기』를 말한다.

2) 설종(薛綜)은 「동경부(東京賦)」를 주해하면서, “탁룡은 궁궐의 전각 이름이다. 방림은 길 양쪽의 나무가 목란(木蘭)이었다.” 고(考)는 성(成), 즉 완성했다는 뜻이다. 지은 후에 그곳에서 제사지낸 것이다. 『춘추좌씨전』에 “중자(仲子)의 묘당을 완성했다[考仲子之宮].”라는 말이 나온다.

3) 부도(浮圖)는 지금의 부처이다. 『속한지』에 따르면, “탁룡궁에서 노자를 제사지냈는데, 아름답게 짠 천[文罽]을 단 위에 깔고, 금테를 두른 그릇을 놓은 후, 꽃처럼 화려한 차양을 치고 교묘에서 쓰는 음악을 사용했다.”

4) 『춘추좌씨전』에 따르면, “사은(史嚚)은 ‘나라가 장차 흥하려면 백성들의 목소리를 듣고, 나라가 장차 망하려면 귀신들의 목소리를 듣는다.’라고 말했다.”



첫 번째로 불교가 언급되는 것은 [환제기]이다. 환제가 도교와 불교에 빠져 숲을 꾸미고 궁전을 보수해 완성한 후 부처와 노자를 제사했다는 내용이다. 붓다의 음차인 부도

(浮圖)를 쓰고 있다. 황제가 제사의 대상으로 삼을 만큼 불교가 이미 크게 일어서 있음을 알 수 있다.



또 궁중에 황로(黃老)와 부처[浮屠]1)의 사당을 짓는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이들의 도는 맑고 깨끗한 데다 무위(無爲)를 귀하게 여깁니다. 또 살리는 것을 좋아하고 죽이는 것을 미워하며 욕심을 없애고 사치를 멀리합니다. 지금 폐하께서는 기호와 욕망을 멀리 하지 않으시는 데다 죽이고 벌주심이 지나치시니 이미 그들의 도와 어그러졌는데 어찌 그 복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노자가 오랑캐 땅에 들어가 부처가 되었다고 합니다.2) 부처가 뽕나무 아래에서 사흘을 묵지 않는 것은 오랫동안 머물러 애착이 생기지 않게 하려고 함이니 이는 마음다짐을 지극히 하려 함입니다.3) 하늘의 신이 아름다운 여자를 보냈을 때 부처는 “이는 단지 가죽 주머니에 피가 가득한 것일 뿐.”4)이라고 하면서 끝내 쳐다보지 않았습니다. 도를 지킴이 이렇듯 한결같아서 능히 도를 이룰 수 있었던 것입니다. 지금 폐하 곁에 있는 야하고 음탕한 여자들은 고운 것으로 따지면 세상의 제일이며, 달고 기름지며 보기 좋은 음식은 맛으로 따지면 천하의 으뜸이니 어찌 황로와 같음을 바랄 수 있겠습니까?




유영은 젊을 때부터 협객들을 좋아하고 빈객들과 교제하기를 즐겼는데, 나이 들어서는 다시 황로의 도를 즐기고 부처[浮屠]를 위해 몸과 마음을 깨끗이 하고 제사하는 법을 배웠다.1)



1) 원굉(袁宏)의 『한기(漢紀)』에 따르면, “부도는 부처를 말하는데, 서역(西域) 천축국(天竺國)에 부처의 도가 있다. 부처란 한나라 말로 깨달은 자라는 뜻으로, 자신의 깨달음으로 뭇 생명을 깨우치려는 자이다. 그 가르침은 자비심을 닦는 것을 중심으로 하는데, 살아 있는 것을 죽이지 않으면서 맑고 깨끗함을 지키는 데 오로지 힘쓴다. [부처의 도를] 정진하는 자를 사문(沙門)이라 한다. 사문은 한나라 말로 쉰다[息]는 뜻인데, 생각을 멈추고[息意] 욕심을 버려 무위(無爲)로 돌아가는 것이다. 또 사람이 죽어도 정신은 멸하지 않아서 다시 형상을 부여받는다고 한다. 살아 있을 때 행한 선행과 악행에 모두 응보가 있기 마련이므로 선을 행하고 도를 닦는 일을 귀하게 여긴다. 그리하여 정신을 단련해서 다시 태어남이 없는 데 이르면 부처가 된다고 한다. 부처는 키가 한 장 여섯 치로 금빛을 띤다. 목 뒤에 해나 달 같은 둥근 빛을 매달고 있는데, 그 신묘한 변화는 방향이 없으며 미치지 못하는 바도 없어서 뭇 생명들을 크게 구제한다고 한다. 처음에 명제가 꿈에 금으로 만든 사람을 보았는데, 키가 크고 몸집도 엄청났다. 그 목 뒤에 해와 달처럼 빛이 나는 걸 보고 뭇 신하들에게 물었다. 어떤 신하가 말하기를, ‘서쪽 땅에 신이 있는데 그 이름을 부처라 합니다. 폐하께서 꿈꾸셨던 것이 바로 이것이 아닐까 합니다.’ 이에 천축국에 사자를 보내 그 도에 대해서 묻고 그 형상을 그려오게 했다.”



세 번째 부분은 [초왕 유영전(楚王劉英傳)]에 나오는 구절이다. 초왕 유영은 후한의 두 번째 임금인 명제(明帝)의 이복동생이다. 기록에 따르면, 그가 중국 역사상 처음으로 불교를 신봉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장회태자 이현의 주에서 언급된, 진나라 때의 학자인 원굉(328~376)의 [한기](흔히 [후한기]라고 불린다.)에는 명제가 꿈에 금불상을 보고 사신을 천축에 보내 그 가르침을 알아보고 형상을 그려오게 했다는 말이 있는데, 이는 신뢰할 수 없는 기록이라는 게 정설이다. 원굉은 불교의 가르침을 아주 깔끔하고 정확하게 요약해 냈는데, 이는 진나라 때 불교 이해의 수준을 보여 준다.


영평 8년(65년), 천하에 조령을 내려 사형죄를 저지른 자 이하 모든 죄수들을 수직비단을 내고 속형하게 했다. 유영이 낭중령(郞中令)을 보내 누런 수직비단과 흰 비단[紈] 서른 필을 받들고 초국의 재상에게 가서 전하게 했다. "번보(蕃輔, 제후국)를 맡아 다스리면서 잘못과 죄악이 포개어 쌓였는데, 커다란 은혜에 기뻐하면서 비단을 받들어 보내니 허물을 속형해 주소서." 초국의 재상이 이 말을 듣고는 명제에게 고해 올렸다. "초왕은 황로의 오묘한 말을 읊조리고 부처의 제사를 숭상하고 있습니다. 한 해에 석 달을 몸과 마음을 깨끗이 하면서 신과 더불어 경계하는데, 어찌 의심받을 일이 있어서 뉘우칠 게 있겠습니까? 차라리 이들을 돌려주어 이포새(伊蒲塞) 상문(桑門)1)의 먹을거리를 돕게 하소서." [명제가] 이를 널리 여러 나라들에 반포하여 모범으로 삼게 했다.


1) 이포새(伊蒲塞)는 곧 우바새(優婆塞, 속세에 있으면서 부처를 믿는 남자. 거사라고도 한다.)로 한나라 말로 옮기면 가까이에서 모신다는 뜻이다. 계율에 따라 행하면서 부처 가까이에 살면서 그를 보필한다는 말이다. 상문(桑門)은 곧 사문(沙門)을 말한다.



네 번째 부분 역시 [초왕 유영전]에 나오는 구절이다. 영평 13년, 초왕 유영은 방술에 빠져들어 역모를 꾀하다가 발각된다. 명제가 태자 때부터 유영은 오직 명제에게 충성을 다했으므로 명제는 그를 특별히 사랑했다. 그러나 아버지인 광무제의 사랑을 별로 못 받은 탓인지, 그는 형제들 중에서 가장 가난하고 적은 땅의 봉국으로 받는다. 유영은 본래 사람이 좋아서 젊었을 때에는 여러 호걸들과 널리 사귀고 빈객들을 끌어모아 활발하게 교제했다. 그러나 봉국에 부임해 촌구석인 초나라 땅에 들어앉자마자 그는 모든 일에 허무를 느꼈는지 도교와 불교에 빠져든다. 아마 꿈을 더 이상 펼칠 수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영웅은 주변 사람들이 내버려 두지 않는다고 했던가. 전국에 있는 제후왕들, 제후들, 문관들 및 무관들과 수시로 연락을 주고받던 그는 영평 8년에 명제의 의심을 피하기 위해 휘하의 재상과 짜고 위와 같은 쇼를 벌인다. 명제가 사면령을 내린 틈을 타서 비단을 바치면서 자신에게 쿠데타 의지가 없음을 보여 준 것이다. 명제는 그에 대한 의혹의 눈길을 거두지는 않았지만, 일단 유영의 정치쇼에 호응해 준다. 그를 별다른 죄가 없으면서도 스스로 죄를 청하면서 용서를 구한 제후의 모범으로 삼은 것이다. 초국의 재상이 쓴 변명서를 보면, 이미 중국인들이 출가한 스님과 우바새의 차이를 인식하고 있었고, 이는 불교가 상당한 수준으로 한나라에 들어와 있다는 암시가 될 수 있다. 그로부터 5년후인 영평 13년 초왕 유영은 마침내 남자(男子)인 연광(燕廣)의 고발로 체포되어 조사를 받는다. 여기서 남자란 벼슬이나 작위가 없는 평민으로 한 집안의 호주를 말한다. 왕을 고발한 사람이 고작 평민 중에서도 최하등인 남자이다. 유영이 방술에 빠져들어 부절을 조작해 역모를 꾀했다는 죄였다. 이 역모 사건으로 인해 몇 년에 걸쳐 광무제 이래의 수많은 공신 집안들이 작위와 나라를 빼앗긴 채 몰락한다. 아버지로부터 나라를 물려받은 명제는 커져만 가는 제후왕들과 공신들의 힘을 견제할 기회를 잡고 있다가, 마침내 교유 관계가 넓고 힘은 형편없이 부족한 초왕 유영을 대상으로 친위 쿠데타를 일으킨 것일 터이다. 어쨌든 이 사건은 후한 초기 정치 지형에 거대한 영향을 미쳐서 장제와 화제를 지날 때까지는 외척과 환관과 공신 집단 사이의 다툼이 결정적으로 표면화화지 않는 계기가 된다. 마치 조선시대 태종 이방원과 같은 역할을 후한의 명제가 행한 것이다. 

 

이전에 [도겸과] 같은 군 사람 척융(笮融)1)이 무리 수백 명을 모은 후 도겸을 찾아가서 의탁하자, 도겸이 그에게 광릉군(廣陵郡), 하비국(下邳國), 팽성국(彭城國)에서 군량을 운반하는 일을 맡겼다. 그러자 착융은 세 군의 물자 수송 임무를 팽개치고 부도사(浮屠寺)2)를 크게 세웠다. 위에는 금으로 된 원반을 겹쳐 올리고, 그 아래에는 누각을 층층이 쌓았는데, 건물을 빙 두르면 가히 삼천 명을 허용할 수 있었다. 황금으로 도금한 상을 만들고 최상품 비단[錦綵]으로 지은 옷을 입혔다. 부처를 씻을 때마다 많은 음식과 술을 베풀어 두고 길에 자리를 넓게 깔았는데, 와서 먹고 지켜보는 자가 무려 일만여 명에 이르렀다.3) 조조가 도겸을 공격해 서쪽 지방이 불안해지자 척융은 남녀 일만여명, 말 삼천 필을 거느리고 광릉군(廣陵郡)으로 달아나니, 광릉태수(廣陵太守) 조욱(趙昱)이 그를 손님의 예로써 맞이했다. 척융은 광릉군의 물자와 재화가 풍부한 걸 보고는 술자리를 틈타서 조욱을 살해하고 병사들을 풀어 크게 약탈했다. 그러고 나서 장강을 건너 남쪽으로 예장군(豫章郡)으로 달아난 후 군수(郡守) 주호(朱皓)를 살해하고, 들어가 그 성을 점거했다. 나중에 양주자사(楊州刺史) 유요(劉繇)가 그를 무찌르자 달아나서 산 속으로 들어갔다가 사람들에게 살해당했다.

조욱은 자가 원달(元達)이며, 낭야국(琅邪國) 사람이다. 자기를 깨끗이 하고 악행을 미워했다. 뜻을 오로지하고 학문에 힘써서 친구라 할지라도 그를 보기 힘들었다. 사람됨이 귀는 사악한 말을 듣지 않았고 눈은 망령된 것을 보지 않았다. 태복(太僕) 종불(種拂)이 방정(方正)으로 천거했다.


1) 착(笮)은 음이 측(側)과 격(格)의 반절이다.

2) 부도는 부처이다. 이에 대한 풀이는 「서강전(西羌傳)」에 보인다.

3) 『헌제춘추(獻帝春秋)』에 따르면, “착융이 사방 사오 리에 이르는 커다란 자리를 펴니 그때마다 비용이 수만금이 들었다.”



다섯 번째 부분은 [도겸전]에 나온다. 도겸은 [삼국지]에서 조조와 싸우다 병들어 죽고 유비에게 서주자사 자리를 물려준 바로 그 사람이다. 인용문에서 척융은 흔히 요즘 발음에 따라 착융이라고 읽는데, 여기서는 장회태자 이현의 주를 따라 척융이라고 읽었다. 척융과 초왕 유영 사이는 거의 150년 정도 차이가 난다. 여기서 척융은 사이비종교 교주처럼 나온다. 군량을 수송하라는 일은 안 하고 그걸 빼돌려서 엄청난 규모의 절을 짓고 예불하는 데 막대한 재화를 소비한다. 본래 청정함으로 이름 높던 불교가 전란을 맞아 조금은 타락한 것이다. 어쩌면 척융의 인간됨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는 조조의 공격을 피해 광릉군으로 갔다가 자신을 받아들여 준 조욱을 살해하고 약탈했으니, 장강을 건너 예장군에 이르렀을 때에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이 때문에 유요에게 패해 산 속으로 달아났을 때 백성들에게 살해당한 것이다. 가히 인과응보라 할 만하다.


『삼국지(三國志)』 「위지(魏志)」에 따르면, “여러 나라에는 각각 따로 마을을 두어 소도라 했는데, 도망자들이 달아나서 그 안으로 들어가면 모두 돌려보내지 않았다. 소도의 뜻은 부도(浮屠, 부처)와 비슷하다.”



여섯 번째 부분은 우리 민족의 역사를 다룬 [동이열전] 중 [한전(韓傳)]에 나온다. 그러나 본문에 나오는 것은 아니고 장회태자 이현의 주석에 언급되므로, 굳이 [후한서]에 나온다고 할 수 없다. 내용도 한국사 시험에 자주 나오는 소도의 뜻이 부처와 비슷하다는 내용뿐이다. 



천축국(天竺國)은 일명 신독(身毒)이라고도 하는데 월지(月氏)로부터 동남쪽으로 수천 리 떨어져 있다. 월지와 풍속이 같고, [기후는] 음습하며 무덥다. 나라에 자주 홍수가 난다. 코끼리를 타고 싸운다. 그 백성들은 월지보다 유약한데, 부처[浮圖]1)의 도를 닦아서 함부로 죽이거나 정벌하지 않으니 마침내 이것이 풍속을 이룬 것이다.


1) 부도(浮圖)는 즉 부처이다.



일곱 번째 부분은 [서역 열전] 중 [천축국전]에 나온다. 천축국의 백성들은 아주 유순한데, 이는 평소에 부처의 가르침을 닦아서 함부로 타인을 살해하지 않으니 마침내 그것이 풍속을 이루었다는 내용이다. 이는 현재에도 인도를 여행하고 온 여행자들이 자주 입에 담는 말이다. 중국 지식인의 눈에 불교의 가르침 중에 가장 특이했던 부분이 아미 "불살생"인 듯싶다. 이는 황제 이래로 계속해서 전란의 숲을 헤쳐오면서 타인을 밥 먹듯이 살해하면서 정벌의 역사를 거듭해 온 중국인들의 삶을 생각해 보면 당연한 것이 아닐까 싶다. 어쩌면 오호십육국의 혼란기를 살아가던 [후한서]의 저자 범엽의 바람일 수도 있다.



세상에 전하는 말에 따르면, 명제(明帝)가 꿈에 금으로 된 사람을 보았는데, 키다 크고 몸집이 엄청났으며 정수리에서 밝은 빛이 솟았다. 이에 뭇 신하들에게 물으니 어떤 이가 말했다.

“서쪽 지방에 신이 있는데, 이름을 부처입니다. 그 모습이 키가 한 장 여섯 자에 이르고 황금빛으로 빛난다고 합니다.”

이에 명제가 천축에 사자를 보내 부처의 도와 법을 물으니 마침내 중국에 그 형상이 그림으로 전하게 되었다. 초왕(楚王) 유영(劉英)이 처음으로 그 도를 믿으니 이로 인해 중국에서 그 도를 받드는 자가 가끔씩 나타나게 되었다.

나중에 환제(桓帝)가 신을 좋아해서 부처와 노자에게 몇 차례 제사지냈는데, 이때부터 백성들 중에서 점차 그 도를 받드는 자가 생겨서 나중에는 드디어 아주 번성하게 되었다.



여덟 번째 부분 역시 [천축국전]에 나온다. 이 부분은 한눈에 중국의 불교 수용사를 정리해 준다. 불교는 명제 때쯤 중국에 들어와서 환제 무렵에 크게 번성하게 되었다. 범엽이 첫머리에 "세상에 전하는 말에 따르면"이라고 시작한 부분은 이미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명제가 이런 꿈을 꾸어 불법을 알아보려고 천축에 사신을 보냈다는 것이 믿을 수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어쨌든 [후한서]에 따르면 중국 최초의 불교 신자는 불운한 사나이 초왕 유영이다. 


이처럼 [후한서]에는 불교와 관련된 기록이 적지않다. 신회는 장회태자 이현보다 한 세대 정도 나이가 어리다. 하지만 그는 아마도 장회태자의 주석본을 읽지는 못했을 것이다. 이 주석본은 1022년에야 비로소 간행되어 널리 보급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가 읽고 호기심을 느낀 부분은 아마도 양해의 상소문에 나오는 부분일 가망성이 높다. 지금 읽어도 훌륭할 정도로 단단하고 아름다운 문장으로 불교의 정신을 높여 황제에게 충언하는 부분이 아니면 어찌 그가 출가를 결심할 수 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