後漢書 [뉴스 속 후한서] 타골, 어찌 우리를 동방의 불꽃이라 했나(브레이크뉴스) 2010/02/21 12:08 by 마왕

인터넷언론인 [브레이크뉴스]에 강동민이라는 칼럼니스트(한민족문화연구원 이사장)가 칼럼을 실었다. 새해를 맞이하여 한민족의 위대함을 알고 세계 평화를 이끌어 갈 민족으로 우뚝 서자는 내용이다. 그러면서 중국의 역사 기록 중 우리 민족에 대해 언급한 여러 문헌을 인용했다. 그중에 [후한서]가 두 군데 있어서 살펴본다.

4. 후한서 동이전(後漢書 東夷傳)은 증언하기를 동이인 조선 사람들은 천성이 유순하고 인성은 욕심이 없고 담백하며 동성 간에는 혼인을 하지 않고 천도를 어기지 아니하는 군자국 이었다고 하였다. (後漢書卷百十五東夷傳 東方夷者言仁而好生 天性柔順易以道御 其人性少嗜欲 同姓不婚 至君子不死之國 東明因至 夫餘而王之於東夷之城 古肅愼氏之國也)

5. 후한서 지리지(後漢書 地理志)에는 은나라가 쇠망하여 기자가 옮겨갔던, 동이 조선 사람들은 천성이 유순하여 어질고 착하며, 도가 행해지는 나라로 도적질 하는 일이 없기 때문에 문을 잠그는 일이 없으며, 부녀자들은 정숙하여 음행을 하는 일이 없고, 옛날 공자도 구이에서 살고 싶어 했던 순결한 백성 들이다. (後漢書卷二十八下 地理志 東賈眞番之利 皆濊貊朝鮮 殷道衰箕子去之朝鮮 犯禁八條 是以其民終不相盜 無門戶之閉 婦人貞信不淫辟 東夷天性柔順 異於三方 故孔子欲居九夷有以也 師古曰 東夷其國有仁賢之化 可以行道也)


황당하지만 이 인용문의 본래 출처가 무엇인지 전혀 알 수 없다. 분명한 것은 [후한서]에는 이 구절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범엽이 쓴 [후한서] 동이열전은 권75에 있으며, 지리지는 권28이 아니라 사마표가 따로 써서 지19부터 지23까지 다섯 권으로 나누어져 있다. 권28은 환담풍연열전이다.  그런데 [후한서] 동이전에 혹시 위와 같은 구절이 있을까 해서 살펴보았다. 원문은 다음과 같다.

王制云:「東方曰夷.」夷者, 柢也, 言仁而好生, 萬物柢地而出[一]. 故天性柔順, 易以道御, 至有君子、不死之國焉[二].  一]事見風俗通. [二]山海經曰:「君子國衣冠帶劍, 食獸, 使二文虎在旁.」外國圖曰:「去琅邪三萬里.」山海經又曰:「不死人在交脛東, 其為人黑色, 壽不死.」並在東方也.


거칠게 옮겨 보면 다음과 같다. 

「왕제(王制)」에 “동방을 이(夷)라 한다.”라는 구절이 있다. 이(夷)는 저(柢), 즉 뿌리이다. 이는 어질어서 살아 있는 것을 좋아하니 만물이 땅에 뿌리를 내리고[柢] 솟아난다는 말이다.1) 천성이 유순하여 도로써 다스리기 쉬웠으며 군자국(君子國)과 불사국(不死國)이 있었다.2)


1) 이 일에 대해서는 『풍속통(風俗通)』에 나온다.


2) 『산해경(山海經)』에 따르면, “군자국(君子國)은 의관을 갖추고 검을 [허리에] 찼으며, 말린 고기를 먹고 두 마리 줄무늬 호랑이를 곁에 두었다.” 『외국도(外國圖)』에 따르면, “낭야국(琅邪國)에서 삼만 리 떨어져 있다.” 또한 『산해경』에 따르면, “불사국(不死國) 사람들은 교경국(交脛國) 동쪽에 사는데, 그 피부는 검고 오래 살아 죽지 않는다.” 이 모든 나라가 다 동방에 있다.


인용문하고 일부 비슷한 부분도 있지만 도저히 같은 글이라고 볼 수 없다. 원문으로 적혀 있는 부분 중 "其人性少嗜欲 同姓不婚"은 [후한서] [예전(濊傳)]에 나오는 표현인데, 그나마 원문은 "其人性愚愨, 少嗜欲, 不請匄. 男女皆衣曲領. 其俗重山川, 山川各有部界, 不得妄相干涉. 同姓不昏."(그 백성들은 성품이 우직하고 욕심이 적어서 구걸하는 바가 없다. 남자와 여자가 모두 옷깃이 둥근 옷을 입는다. 그 풍속은 산과 물을 중시하는데, 산과 물에는 각각 부의 경계가 있어 서로 범하거나 건널 수 없도록 했다. 같은 성끼리는 결혼하지 않았다.)으로 제멋대로 짜깁기한 것이다. "東明因至夫餘而王之於東夷之城 古肅愼氏之國也"의 구절은 인용자도 우리말로 옮기지 않았거니와 어느 문헌에 나오는 말인지 알 수 없다. 인용 부분을 굳이 우리말로 옮겨 보면 "동명왕이 부여에 이르자, 그를 동이의 성에서 그를 왕으로 받들었는데, 옛날 숙신씨의 나라가 있던 곳이었다." 정도일 것이다.

두 번째 인용문은 [후한서] 지리지에는 나오지 않는다. 혹시나 해서 [한서]를 찾아보았다. 지리지는 [한서] 권28에 상하로 나누어져 있으므로 여기서 [후한서]는 아마 [한서]의 잘못일 것이다. 그런데 그 문장은 비슷하지만 정확하지 않다. 본래 이 문장은 낙랑군과 현도군을 설명하는 와중에 나오는 것이다. 인용문 첫머리에 나오는 "東賈眞番之利"는 어디서 온 말인지 알 수 없다. [한서] 지리지 원문은 다음과 같다.

「玄菟 ․ 樂浪, 武帝時置, 皆朝鮮 ․ 濊貉 ․ 句驪蠻夷. 殷道衰, 箕子去之朝鮮, 教其民以禮義, 田蠶織作. 樂浪朝鮮民犯禁八條: 相殺以當時償殺; 相傷以谷償; 相盜者男沒入爲其家奴, 女子爲婢, 欲自贖者, 人五十萬. 雖免爲民, 俗猶羞之, 嫁取(娶)無所讎, 是以其民終不相盜, 無門戶之閉, 婦人貞信不淫辟(僻). 其田民飮食以籩豆, 都邑頗放(仿)效吏及內郡賈人, 往往以杯器食. 郡初取吏于遼東, 吏見民無閉臧(藏), 及賈人往者, 夜則爲盜, 俗稍益薄. 今于犯禁浸多, 至六十余條. 可貴哉, 仁賢之化也!然東夷天性柔順, 異于三方之外, 故孔子悼道不行, 設浮于海, 欲居九夷, 有以也夫!


이를 거칠게 옮겨 보면 다음과 같다.

현도군(玄菟郡)과 낙랑군(樂浪郡)은 무제(武帝) 때 설치했는데, 모두 조선(朝鮮), 예맥(濊貉), 구려(句驪)의 오랑캐들이다. 은나라의 도가 쇠퇴했을 때, 기자(箕子)가 달아나서 조선으로 와서 그 백성들에게 예의와 농사와 양잠과 직조를 가르쳤다. 낙랑군에 사는 조선 백성들에게는 여덟 조의 금법(禁法)이 있었다. 사람을 죽인 자는 사형에 처한다. 사람을 상하게 한 자는 곡식으로 갚는다. 남의 물건을 도둑질한 자는 재산을 몰수하고 노비로 삼으며 여자들 역시 종으로 삼는다. 만약 스스로 죄를 대속하고자 하면 사람마다 오십만 냥을 낸다. 그러나 비록 면천되어 평민이 될지라도 세속에서 그를 수치스럽게 여겼기 때문에 시집 장가를 들려 해도 짝을 구할 수 없었다. 이 때문에 그 백성들은 마침내 서로 도둑질하는 바가 없었기에 문을 닫아걸지 않았으며 부인들은 정숙하고 신실하여 음란한 바가 없었다. 농민들은 먹고 마실 때 대나무 그릇이나 나무 그릇[籩豆]을 사용했으며, 도읍에서는 관리나 내군(內郡, 한나라 본토에 있는 군)의 장사꾼들을 본받아 때때로 술잔처럼 생긴 그릇을 써서 음식을 먹었다. 처음에 군에서는 요동군(遼東郡)에서 관리들을 받아들였는데, 관리들이 와서 그 백성들이 문을 닫아걸고 감추는 것이 없는 것을 보았으며, 나중에 장사꾼들이 와서 밤이 되면 도적으로 바뀌었으므로 풍속이 점차 각박해졌다. 이 때문에 지금에 이르러서는 금법이 많아져 육십여 조에 이르렀다. 귀하구나, 어짊으로 교화함이여! 그러나 동이 사람들은 타고난 성품이 유순하여 다른 세 방향의 바깥 세상과는 달랐으므로 공자는 도가 행해지지 않자 바다에 배를 띄워 구이(九夷)에 가서 살고자 했으니 까닭이 있는 것이다!
 

옛 문헌을 인용해서 자기 주장을 증명하려 할 때에는 늘 원전에 대한 치밀한 고증이 필요하다. 그렇지 않다면 주장은 금세 거짓말이 되어 버릴 것이다. 일요일 아침 황당한 기분에 글을 올려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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