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덕마황후(明德馬皇后)
명덕황후 마 씨는 휘를 알 수 없으며[某],1) 복파장군(伏波將軍) 마원(馬援)의 막내딸이다. 어렸을 때 부모를 잃었다. 오빠 마객경(馬客卿)은 매우 총명했으나 어린 나이에 세상을 떠났고, 어머니 인 부인(藺夫人)은 근심과 슬픔 끝에 병이 나서 정신이 맑지 못했다. 이때 마 씨는 열 살이었다. 하지만 집안일을 맡아 처리하고[幹理], 노복[僮御]들을 훈계하고 다스리며,2) 집안 안팎에서 상의해 오는 것에 답함에 있어 일하는 것이 어른과 다름없었다. 처음에는 집안사람들이 그 일을 알지 못하다가 나중에 그 말을 듣고는 모두 그 뛰어난 재기에 감탄했다.
일찍이 마 씨가 오랫동안 병들어 누웠을 때, 태부인(太夫人, 열후의 어머니.)이 그녀를 위하여 점을 쳐 보라고 영을 내렸다. 그때 점쟁이가 말했다.
“이 아이에게 비록 우환이 있을지라도 나중에는 크게 귀하게 될 것입니다. 그 길함이 말로 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나중에 또다시 관상쟁이를 불러 여러 딸들을 점치게 했는데, [관상쟁이가] 마 씨를 본 후 크게 놀라면서 말했다.
“저는 반드시 이분께 신하를 칭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분이 귀하게 되더라도 아들이 모자랍니다. 만약 다른 사람 아들을 기르는 데 힘을 다하면 반드시 아이를 낳는 것보다 훨씬 낫게 될 것입니다.”
그전에 마원이 오계(五溪) 만족들을 정벌하러 갔다가 군중에서 죽자 호분중랑장(虎賁中郞將) 양송(梁松)과 황문시랑(黃門侍郞) 두고(竇固) 등이 그를 참소했다. 이 때문에 가세가 급격히 기운 탓에 몇 차례나 권세가들에게 모멸을 당했다. 마 씨의 사촌오빠인 마엄(馬嚴)이 울분을 이기지 못하고 태부인에게 알린 후 두씨(竇氏)와의 혼약을 파기하고, 딸을 액정에 들여보낼 길을 구했다. 이에 상서를 올려 말했다.
신의 작은아버지 마원은 은혜를 입고[孤]3) 보답하지 못했는데도 그 아내와 아이들은 특별한 은총을 얻어 몸을 보전할 수 있었기에 폐하를 받들고 우러르매 마치 하늘같이 아버지같이 여기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의 정이란 이미 목숨을 얻을 수 있었는데도 감히 다시 복을 구하려 합니다. 아직 태자 및 여러 왕들의 배필이 정해지지 않았다고 들었습니다. 마원에게는 세 딸이 있는데, 큰딸은 열다섯 살이고 둘째 딸은 열네 살이며 막내딸은 열세 살입니다. 모두 용모와 거동과 머리카락과 피부가 극도로 아름다운 데다4) 윗사람에게는 효성스럽고 아랫사람에게는 세심하며, 온순하고[婉]5) 정숙한 품성에 예절까지 갖추었습니다. 원컨대 상공(관상쟁이)을 내리시어 간택 여부를 가려 주시옵소서. 만의 하나라도 간택된다면 마원은 황천에서 [그 이름이] 썩지 않을 것입니다. 게다가 마원의 고모 집안 자매들은 모두 성제의 첩여(婕妤)로서 함께 연릉(延陵)에 묻혔습니다. 신 마엄은 폐하의 은택을 입고 새로운 삶을 얻었사오나, 바라건대 죽은 고모의 인연(그만큼 아름답다는 뜻.)에 비추어 [마원의 딸들로] 후궁(後宮)을 채우소서.
이때 마 씨가 선발되어 태자궁(太子宮)으로 들어갔다. 나이가 열세 살이었다. 음 황후를 받들어 모시고 옆으로 같은 지위[의 비빈]들을 대할 때에는 늘 예법이 잘 갖추어졌으므로 아래위가 모두 편안해졌다. 마침내 특별한 은총을 얻어 늘 후당(後堂)에 거하게 되었다(태자를 모시게 되었다는 뜻).
명제가 즉위하자 귀인이 되었다. 때마침 마 귀인의 전어머니[前母, 후취의 자식이 아버지의 전취를 이르는 말.]의 큰딸 가 씨(賈氏)가 선발되어 들어와 유달(劉炟, 장제)을 낳았다. 마 귀인에게 아이가 없자 명제는 명령을 내려서 유달을 데려다 기르도록 했다. 그러면서 마 귀인에게 말했다.
“사람이 반드시 몸소 아이를 낳아야 하는 것이 아니오. 다만 사랑으로 기를 때 지극하지 못할까 근심할 뿐이오.”
이에 마 귀인은 마음을 다하여 유달을 돌보아 길렀는데, 애쓰고 수고함이 친아들보다 더할 정도였다. 유달 역시 효성스러운 데다 성품이 순박하고 인정이 많으며 은혜로운 성품을 타고났으므로 모자가 서로 자애로워서 처음부터 끝까지 실낱같은 틈[纖介之間]6)도 없었다.
마 귀인이 언제나 황제의 후사가 많지 않음을 두고 우려하고 탄식한 끝에 좌우[의 후비]를 천거해 [황제에게] 올렸는데 다만 부족하지 않을까만을 두려워했다. 후궁 중에 나아가 [황제를] 모신 사람이 있으면 매번 위로하고 거두어들였다. 만약 여러 번 총애를 받으면, 그때마다 번번이 융숭한 대우를 더했다.
영평 3년(60년)
봄
담당 관리들이 장추궁을 세우자고 상주했는데,7) 황제가 아무 말도 없었다. 그때 음 태후가 말했다.
“마 귀인의 덕이 후궁을 덮었으니[德冠後宮], 즉 이 사람밖에 없다.”
드디어 황후로 세워졌다.
그보다 며칠 전, 마 황후는 작은 날벌레들이 무수히 몸으로 다가와 피부를 뚫고 들어왔다가 다시 빠져나가 날아가는 꿈을 꾸었다. 이미 후궁의 자리를 바로잡은 후였기 때문에 스스로 더욱 겸손하고 정숙하게 행했다.
마 황후는 키가 일곱 자 두 치였고, 입은 네모났으며[方口, 이가 드러나지 않으므로 부귀영화를 누린다고 함.], 머리카락은 아름다웠다. 『역경』을 외워 읊는 데 능통하고, 『춘추』와 『초사(楚辭)』를 읽는 것을 좋아했으며, 『주관(周官, 주례)』과 동중서(董仲舒)의 책8)을 특히 사랑했다. 또한 늘 거친 비단으로 만든 옷을 입었으며9) 치마 가장자리를 꾸민 적이 없었다. 한번은 삭망(朔望, 초하루와 보름) 때 여러 비빈들과 공주들이 조청(朝請, 황제나 황후를 알현하는 것.)10)하러 왔다. 마 황후의 포의(袍衣, 두루마기 모양의 겉옷.)는 실제로는 거칠고 올 굵은 비단으로 지었는데도 멀리서는 기곡(綺縠, 엷고 하늘하늘한 비단.)으로 지은 것처럼 보였는데, 사람들이 와서 보고 [그 사실을 알고는] 웃음을 터뜨리곤 했다. 이에 마 황후가 말했다.
“이 비단은 특히 염색하기가 쉬우므로 그것을 써서 옷을 지은 것뿐이오.”
이 말을 듣고 육궁 사람들 중 감탄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또한 명제가 원유(苑囿, 상림원과 광성유)가 있는 낙양 이궁으로 행차하려 할 때마다 마 황후가 번번이 이슬과 안개를 맞으면 감기에 걸리기 쉽다고 경계하면서 간절하고 빈틈없이 말했기 때문에 이를 황제가 받아들이는 바가 많았다. 한번은 황제가 탁룡원(濯龍園)11)으로 행차해서 비빈들을 모두 부르고 하비왕(下邳王) 이하 왕들도 곁에 있게 하고는 황후를 청했다. 황제가 웃으면서 말했다.
“이 사람은 음악을 좋아하지 않아서 오더라도 즐기지 않을 거야.”
이런 연유로 놀고 즐기는 일이 일찍이 어느 때보다 드물어졌다.
영평 15년(72년)
어느 날 명제가 지도를 살피면서 장차 황자들을 봉하면 그 식읍 크기를 다른 나라들(광무제가 아들들에게 분봉한 나라들을 말함.)의 절반으로 하려고 했다. 마 황후가 그것을 보고 말했다.
“황자들마다 식읍을 몇 현씩만 내리신다면, 그에 맞추어 어찌 검소하게 살지 않겠습니까?”
황제가 답했다.
“옳소. 내 아들이 어찌 돌아가신 아버님의 아들과 동등할 수 있겠소? 해마다 그들에게 이천만 냥이면 충분할 것이오.”
이때 초왕 유영의 옥사가 해마다 끊이지 않아 죄수들이 서로 끌어들여 죄를 입증하니 이에 연루되어 체포된 자가 무척이나 많았다. 마 황후는 그중 많은 것이 지나치다고 생각하여 틈을 내어 이 일을 입에 올리면서 비통해 했다. 명제가 느끼고 깨닫는 바가 있어 밤에 일어나 왔다 갔다 하다가 [그 말을] 받아들이기로 생각하니12) 마침내 많은 사람이 용서받을 수 있었다.
당시에 여러 장수들이 상주한 사건들 및 공경들이 따지고 밝혀[較]13) 의문을 올린 것 중에서 평결하기 어려운 것이 많았는데, 명제가 몇 차례나 이를 마 황후에게 살펴보게 했다. 마 황후가 번번이 이를 하나하나 나누어 살펴보고 이치를 밝혀 나아가니 각각 그 실정을 알 수 있었다.
이처럼 명제를 받들어 모실 때마다 번번이 정사를 의논했는데 도움 되는 바가 많았을 뿐 단 한 번도 친정을 위하여 청하는 바가 없었으므로 사랑과 은총이 날이 갈수록 높아졌으며 처음부터 끝까지 줄어들지 않았다.
[영평 18년(75년)]
명제가 붕어하고 장제가 자리에 오르자, 마 황후를 높여 황태후로 삼았다. [명제의] 여러 귀인들은 [예법에 따라] 남궁으로 옮겨 살아야 했다. 황태후가 석별의 정을 크게 느껴서 각 귀인들을 불러 왕이 쓰는 붉은색 인끈을 내리고, 네 마리 말이 끄는 안거(安車, 앉아서 탈 수 있는 일인용 작은 수레)와 백월(白越, 월나라 땅에서 나는 가는 베) 삼천 서(端, 베 여섯 장의 길이), 잡백(雜帛, 색깔 있는 실로 짠 명주) 이천 필, 황금 열 근을 더했다. 몸소 『현종기거주(顯宗起居注)』를 짓고, 오빠 마방(馬防)의 관직 참의약사(參醫藥事, 궁궐에 들어와서 황제의 의약 수발을 관장하는 것.)를 삭탈하게 했다. 장제가 청하여 말했다.
“외삼촌은 황문(黃門)으로 아침저녁으로 [돌아가신 황제를] 공양한 지 일 년이 넘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이를 특별히 기리지도 않고, 또 부지런히 애쓴 공을 기록하지도 않으니, 설마 과하지는 않겠습니까!”
황태후가 답했다.
“후세에 돌아가신 황제께서 후궁의 집안을 무척이나 친애했다는 말을 듣고 싶지 않소. 그래서 이를 드러내지 못하게 한 것이오.”
건초 원년(76년)
장제가 여러 외삼촌들에게 작위를 내리려고 했으나 황태후가 들어주지 않았다.
다음 해[건초 2년(77년)]
여름
큰 가뭄이 들었다. 어떤 자가 황제에게 나아와 이르기를 외척을 봉하지 않았으므로 가뭄이 들었다고 했고, 담당 관리들은 마땅히 옛 법14)에 따라야 할 것이라고 상주했다. 그러자 황태후가 조서를 내렸다.
지금 황제에게 나아와 일을 아뢴 자들은 모두 짐에게 아첨하여 복을 구하려는 자들일 뿐이다. 옛날에 왕 씨(王氏)의 다섯 동생을 같은 날에 함께 제후로 봉했을 때,15) 누런 먼지가 사방을 어둡게 했을 뿐 단비가 내려 이에 응했다는 말을 들어보지 못했다. 또 전분(田蚡)과 두영(竇嬰)은 총애가 귀해지자 제멋대로 행동한 끝에 끝내 뒤집어져 패망하는 화를 입었음이 대대로 전하고 있다.16) 그러므로 돌아가신 황제(명제)께서는 외척들을 삼가 방비하여 추기(樞機)의 자리17)에 있도록 하지 않았다. 또 여러 아들들을 봉할 때에도 식읍을 초국(楚國), 회양국(淮陽國) 등 여러 나라의 절반으로 하면서, 늘 “내 아들이 어찌 돌아가신 황제(광무제)의 아들 등과 나란히 할 수 있겠는가.”라고 말씀하셨다. 그런데 지금 담당 관리들은 어찌하여 마씨를 음씨와 견주려 하는가! 내가 비록 천하의 어머니가 되었으나 누인 비단으로 만든 옷을 입고 달콤한 것을 먹지 않았으며, 좌우의 사람들도 무명옷을 입히고 향낭을 달지 못하게 하여 솔선수범으로써 아랫사람들을 이끌고자 했다. 또한 친정 집안사람들이 이러는 내 모습을 보면 마음 아파하면서 스스로 경계하기를 바랐으나 그들은 다만 황태후께서는 평소에도 검소함을 좋아했다고 웃으며 말할 뿐이었다. 얼마 전 탁룡문(濯龍門) 앞을 지나가다가 친정집에 와서 문안하는 사람들을 보았는데, [문 앞의] 수레들은 흐르는 물과 같고 [오가는] 말들은 헤엄치는 용과 같았으며 노복들조차 초록빛 토시[褠]18)를 차고 소매와 옷깃이 눈부시게 희었다. 이에 고개를 돌려 내 수레꾼을 살펴보니 입성이 오히려 그에 미치지 못했다. 그러나 내가 성내어 그들을 꾸짖지 않고 해마다 내리던 하사품만 끊어 버린 것은 말없이 그 마음을 부끄럽게 하려고 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게으른 탓에 집안을 잊고 나라를 근심하는 마음이 없었다. 신하를 알아보는 데는 임금보다 나은 사람이 없거늘, 하물며 친족은 어떠하겠는가? 내가 어찌 위로는 돌아가신 황제의 뜻을 저버리고 아래로는 돌아가신 분(마원)의 덕을 어그러뜨리면서 서경(장안)에서 수없이 있었던 패망의 화를 또다시 잇겠는가!19)
그러고 나서 굳게 허락하지 않았다.
장제가 조서를 살펴보고 슬피 탄식하고 나서 다시 거듭 청하여 말했다.
“한나라가 일어선 이래, [황제의] 외삼촌들이 제후가 되는 것은 황자가 왕이 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태후께서 진실로 겸허하신 것은 좋으나 어찌 오직 저만 세 외삼촌에게 은혜를 베풀지 못하게 하십니까? 게다가 위위(衛尉)는 나이가 많고 두 교위(校尉)는 큰 병에 걸렸습니다.20) 말씀하신 것처럼 계속 꺼리신다면 저는 뼈에 사무치는 회한을 오래도록 품고 살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이 바로 길한 때이니 지체하지 마십시오.”
황태후가 답했다.
“내가 되풀이해서 고민하다가 양쪽이 다 좋은 것을 생각해 낸 것이오. 내 어찌 헛된 겸양의 명예를 얻으려고 황제로 하여금 외시(外施)21)를 내리지 못해 꺼리는 마음을 품게 하려 했겠소! 예전에 두 태후(竇太后)가 왕 황후(王皇后)의 오빠22)를 제후로 봉하려 했을 때, 승상인 조후(條侯)가 고조와의 맹약을 언급하면서, 군공(軍功)을 세우지 않은 경우에는 유씨가 아니면 제후가 될 수 없다고 했소.23) 지금 마씨들은 나라에 공이 없으니 어찌 음 황후나 곽 황후와 같은, 한나라가 다시 일어날 때의 황후들과 똑같을 수 있겠소? 부유하고 고귀한 집안을 보면 늘 녹봉과 관직이 겹쳐졌으나, 한 해에 두 번 과실을 맺는 나무는 반드시 그 뿌리가 상하는 법이오.24) 또한 사람들이 제후로 봉해지기를 바라는 이유는 위로는 제사를 받들고 아래로는 따뜻한 옷과 풍족한 음식을 구하려는 것뿐이오. 지금 [마씨들은] 제사는 [태관에서] 사방의 진귀한 것을 받으며, 옷과 음식은 어부(御府, 황제의 물건을 보관하는 창고.)에서 넉넉히 내려 주는데, 이것으로 어찌 만족할 수 없고 반드시 현 하나를 얻어야만 한단 말이오? 이는 내가 이미 충분히 따져 보았으니 의심을 품지 마오. 무릇 지극한 효성스러운 행동은 어버이를 편안케 하는 것을 최상으로 여기오. 지금 몇 차례나 이변을 만난 끝에 곡식 값이 몇 배나 올라서 밤낮으로 근심하고 두려워하며 앉으나 누우나 마음이 편하지 않소. 그런데도 외척을 봉하는 일을 먼저 하고자 하니 이는 자애로운 어머니의 부지런함[拳拳]25)을 어기는 것이오! 나는 평소에 성정이 굳세고 성급하여 가슴속에 [병의] 기운이 있으니 늘 숨을 고르게 하지 않으면 안 되오. 만약 음과 양이 고루 조화를 이루고, 변경이 깨끗하고 조용해지면 그후에는 황제 뜻대로 하시오. 그때가 되면 나는 당연히 입에 엿[飴]26)을 물고 손자들 희롱하며 다시는 정치에 관여하지 않겠소.”
이 무렵 신평공주(新平公主)의 마부가 실수로 불을 냈는데, 불이 북각(北閣)의 후전(後殿)에까지 미쳤다. 황태후는 이를 자기 허물이라고 생각해 잠잘 때나 깨어 있을 때나 기뻐하지 않았다. 원릉(광무제의 능)에 제사해 아뢸 때가 되었는데도 스스로 이를 대비해 삼가지 않았음을 인책한 끝에 능원에 오르는 것을 부끄러워하여 끝내 나아가지 않았다.
그보다 이전에 [황태후의 어머니인] 태부인을 장사지내고 나서 봉분을 조금 높게 올렸는데, 황태후가 이를 지적하자 오빠 마료(馬廖) 등이 즉시 그것을 깎아서 줄였다. 그 밖의 친족들 중에서 겸손하고 평소에 의를 행하는 자가 있으면 번번이 따뜻한 말을 해 주고 상으로 재물과 지위를 내렸다. 실오라기 하나만 한 잘못이 있으면, 먼저 근엄한 얼굴빛을 보여 경계하고 나중에 꾸짖음을 더했다. 또 수레와 복장을 아름답게 꾸미면서 법도에 맞지 않는 사람이 있으면, 곧바로 호적에서 끊어 버리고 고향으로 돌려보냈다. 광평왕(廣平王), 거록왕(鉅鹿王), 낙성왕(樂成王)은 말과 수레가 질박하고 꾸밈이 없었으며 금과 은으로 장식함이 없었다. 장제가 이 사실을 황태후에게 알리자 황태후가 즉시 각각 돈 오백만 냥씩을 하사했다. 이에 안팎이 감화되어 따르니 옷 입는 것이 한결같았으며, 여러 집안에서 황송하게 생각하는 마음이 영평(명제) 시절보다 갑절이나 더했다.
황태후는 직실(織室)27)을 설치하고 탁룡원 안에 잠실을 둔 후, 자주 가서 그것을 살펴보는 것을 즐거움으로 삼았다. 항상 장제와 더불어 아침저녁으로 정사를 이야기했으며, 여러 소왕(小王, 어른이 되지 않은 왕)들을 가르치고 더불어 경서를 논의했으며 평생을 하나씩 이야기해 주면서 하루 종일 온화하고 화목하게 지냈다.
건초 4년(79년)
천하가 풍요롭고 넉넉해졌으며 바야흐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자 황제가 끝내 세 외삼촌 마료, 마방, 마광을 열후로 봉하려 했다. 세 사람이 모두 사양하면서 다만 관내후로 봉해 주기를 청했다. 황태후가 그 말을 듣고 말했다.
“성인이 가르침을 베풀 때에는 그 지역에 따라 각각 다르니 사람의 성정을 아는 것은 능히 한결같을 수 없다.28) 젊을 때 나는 다만 죽백(竹帛, 사서)에 기록되기를 사모했을 뿐 뜻이 운명을 돌아보는 것에는 미치지 못했다.29) 지금 나는 비록 늙었지만 다시 ‘얻음[得]을 경계하여’30) 밤낮으로 위태롭게 될까 두려워하면서[惕厲]31) 스스로 낮추고 덜어내려 하고 있다. 그리하여 머물 때에는 편안함을 구하지 않으며 먹을 때에는 배부를까를 생각지 않는다. 오직 끝까지 이 길에 올라서 돌아가신 황제를 저버리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다. 그 때문에 형제들을 교화하고 인도하면서 함께 이 뜻을 같이하다가 눈을 감는 날에도 한이 되는 바가 없고자 했다. 그런데 어찌 늙은이의 뜻이 다시 좇지 못할 줄 알았으랴? 이제 만년에 이르기까지 오랫동안 한을 품겠구나!”
마료 등이 하는 수 없이 봉토와 작위를 받은 후에 자리에서 물러나 집으로 돌아갔다.
이 해 황태후가 병들어 누웠다. 점치고 빌어서 병을 고친다는 의원[巫祝小醫]을 믿지 않았기 때문에 몇 차례나 칙서를 내려 산천에 빌면서 제사하는 것을 멈추게 했다.
6월
황태후가 붕어했다. 황후에 오른 지 스물세 해 만이었으며, 나이는 마흔 살이 조금 넘었다. 현절릉에 합장했다.
1) 『일주서』 「시법해」에 따르면, “충성스럽고 온화하며 순진하고 정숙한 것을 덕(德)이라 했다.” 휘를 알 수 없는 것은 역사에서 그 이름이 망실되었기 때문이다. 아래의 경우도 모두 이와 같다.
2) 간(幹)은 정(正), 즉 바르다는 뜻이다. 『광아』에 따르면, “동(僮)과 어(御)는 모두 부리는 사람을 말한다.”
3) 고(孤)는 부(負), 즉 등에 진다는 뜻이다.
4) 『동관기(東觀記)』에 따르면, “명제 마 황후는 머리카락이 아름다웠다. 네 번 틀어 올려 크게 쪽을 지었다. 그런데 쪽을 다 틀어 올리고도 오히려 남음이 있어 그 둘레를 세 번이나 더 둘렀다. 눈썹은 먹[黛]으로 그릴 필요가 없을 정도로 짙었는데, 다만 왼쪽 눈썹 끝이 조금 빠져서 좁쌀 같은 것으로 그것을 보완했다. 늘 병을 칭했으나 죽을 때까지 황제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5) 완(婉)은 순(順), 즉 순하다는 뜻이다.
6) 섬개(纖介)는 작고 가는 것을 말한다. 간(間)은 극(隙), 즉 틈이라는 뜻이다.
7) 황후가 거하는 궁이다. 장(長)은 오래도록이라는 뜻이고, 추(秋)는 만물이 성숙한 때이므로 그런 이름이 붙은 것이다. 황후를 세우기를 청했지만 감히 그것을 가리켜 말할 수 없었기에 궁궐 이름으로 그것을 대신한 것이다.
8) 『주관』은 『주례』이다. 동중서의 책이란 「옥배(玉杯)」, 「번로(蕃露)」, 「청명(淸明)」, 「죽림(竹林)」 등을 말한다. 번(蕃)은 음이 번(繁)이다.
9) 대련(大練)은 거친 비단[大帛]을 말한다. 두예는 『춘추좌씨전주』에서 “대백(大帛)은 두껍게 짠 비단[厚繒]이다.”라고 했다. 태후의 오빠 마료(馬廖)가 상서를 올려 말했다. “지금 폐하께서는 몸소 두껍게 짠 비단[厚繒]으로 만든 옷을 입었습니다.”라고 말했는데, 이 사실을 말한다.
10) 한나라의 법률에 따르면, 봄에는 조(朝)라 하고, 가을에는 청(請)이라 한다.
11) 『속한지』에 따르면, 탁룡(濯龍)은 원(園)의 이름으로 북궁 가까이에 있다.
12) 마 황후의 말을 받아들이기로 생각했다는 말이다.
13) 『광아』에 따르면, “교(較)는 명(明), 즉 밝혀서 드러낸다는 뜻이다.”
14) 한나라 때의 제도에 따르면, 외척에게 은택을 내려 제후로 봉했다. 이를 옛 법이라고 한 것이다.
15) 한나라 성제가 황태후의 동생 왕담(王譚), 왕상(王商), 왕립(王立), 왕근(王根), 왕봉시(王逢時) 등을 봉하여 한꺼번에 관내후로 삼았다.
16) 전분은 한나라 경제의 비인 왕 황후(王皇后)의 친동생 무안후(武安侯)를 말한다. 승상이 되었으나 탐욕스럽고 교만했으며 회남왕과 더불어 패상에서 사적인 밀담을 나누었다. 나중에 죽고 난 후 무제가 말했다. “만약 무안후가 살아 있었더라면 일족을 멸했을 것이다!” 두영은 한나라 문제의 비인 두 황후(竇皇后) 사촌오빠의 아들인 위기후(魏其侯)를 말한다. 승상이 되었을 때, 관부(灌夫)와 붕당을 이룬 죄로 기시형에 처해졌다.
17) 추기는 [황제를] 아주 가까운 곳에서 모시는 요직을 말한다. 『춘추운두추(春秋運斗樞)』에 따르면, “북두칠성의 첫 번째 별을 천추(天樞)라 하고, 두 번째 별을 선(琁)이라 하며, 세 번째 별을 기(機)라 한다.”
18) 구(褠)는 토시[臂衣]로, 지금의 비구(臂韝)이다. 좌우의 팔을 동여매어 일하기 편하게 하는 것이다.
19) 서경(西京, 장안)의 외척 여록(呂祿), 여산(呂產), 두영, 상관걸(上官桀)·상관안(上官安) 부자, 곽우(霍禹) 등은 모두 주살되었다.
20) 위위는 마 태후의 오빠 마료를, 두 교위는 오빠 마방과 마광(馬光)을 말한다.
21) 은택을 내려 외가를 제후로 봉하는 것을 외시(外施)라고 한다.
22) 두 태후는 문제(文帝)의 황후이다. 왕 황후는 경제의 황후이다. 오빠는 왕신(王信)을 말하는데, 나중에 개후(蓋侯)로 봉해졌다.
23) 조후는 주아부(周亞夫)를 말한다. 『한서』에 따르면, “고제(高帝, 한 고조 유방)가 공신들과 더불어 유씨가 아니면 왕이 될 수 없고 공이 없으면 제후가 될 수 없다고 맹약했다. 또 맹약을 지키지 않으면 천하가 그를 공격하게 했다.”
24) 『문자(文子)』에 따르면, “일 년에 두 번 과실을 맺는 나무는 뿌리가 반드시 상하고, [무덤에] 묻어 둔 것을 파내는 집안은 나중에 반드시 재앙을 입는다.”
25) 권권(拳拳)은 부지런히 힘쓰는 것을 말한다. 음은 권(權)이다.
26) 『방언(方言)』에 따르면, “이(飴)는 당(餳), 즉 엿이라는 뜻이다. 진(陳), 초(楚), 송(宋), 위(衛) 땅에서 통용되는 말이다.”
27) 『한서』에 따르면, 동직(東織)과 서직(西織)은 소부에 속한다. 평제가 이름을 직실로 고쳤다.
28) 『예기』 「왕제」에 따르면, “무릇 백성들에게 필요한 재물을 마련하는 것은 반드시 하늘과 땅의 차가움과 따뜻함, 건조함과 습윤함에 따라야 하며, 넓은 계곡과 커다란 하천에 따라 그 제도를 달리해야 한다. 그 사이사이에 사는 백성들 역시 풍속을 달리한다. 그러므로 그 가르침을 닦을 뿐 풍속을 바꾸지 않으며, 그 정치를 가지런히 할 뿐 마땅함을 바꾸지 않는다. 중원과 사방 오랑캐 등 다섯 방향의 백성들은 모두 각자의 성정이 있으니 옮겨 고칠 수 없다.”
29) 어렸을 때 옛 사람을 사모하여 죽백에 이름이 오르기를 바랐으나, 수명의 길고 짧음은 알지 못했다는 뜻이다.
30) 『논어』에서 공자가 말했다. “젊었을 때에는 색을 경계하고, 나이 들어서는 얻음[得]을 경계한다.” 득(得)은 탐욕스럽고 인색한 것을 말한다. 여기서 또다시 작위를 내려 봉하는 것을 아까워한다는 말은 함부로 친척들을 봉하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는 뜻이다.
31) 척(惕)은 구(懼), 즉 두려워한다는 뜻이다. 려(厲)는 위(危), 즉 위태롭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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