後漢書 [후한서 열전] 모융전(牟融傳) 2009/10/05 23:52 by 마왕



모융(牟融)은 자가 자우(子優)이며 북해군(北海郡) 안구현(安丘縣) 사람이다. 어렸을 때 널리 학문을 익혀서 대하후(大夏侯)1)의 『상서(尙書)』를 가르쳤는데, 문도가 수백 명에 이르렀으며 그 이름을 주리(州里)라고 했다. 사도무재(司徒茂才)로 천거되어 풍현(豐縣)의 현령이 되었다.2) 일을 맡은 지 세 해 만에 현에 송사가 없어졌으며 주군(州郡)에서 가장 높은 평가를 받았다.

사도(司徒) 범천(范遷)3)은 모융을 천거하면서 충성스럽고 정직하며 공평하고 올바른 데다 학문과 품행을 함께 갖추었으므로 마땅히 조정에 있게 함과 동시에 그의 치적을 높여야 한다고 말했다.



영평(永平) 5년(62년)


조정에 들어와 포욱(鮑昱)을 대신하여 사예교위(司隸校尉)가 되었다. 죄를 들추어내 법으로 바로잡는 바가 많았으므로 모든 관료가 그를 존경하면서도 두려워했다.



영평 8년(65년)


포함(包咸)을 대신하여 대홍려(大鴻臚)가 되었다.



영평 11년(68년)


하양홍(鮭陽鴻)4)을 대신하여 대사농(大司農)이 되었다. 이 무렵 명제가 정사를 부지런히 살피고 공경들은 자주 조회를 열었는데, 그때마다 정사를 의론하고 송사를 판결했다. 모융은 경전에 밝고 재주가 뛰어나며 의론을 잘했으므로 조정 대신들이 모두 그 재능에 탄복했다. 명제 역시 몇 차례나 찬탄하면서 그 재주가 가히 재상감이라고 여겼다.



이듬해[영평 12년(69년)]


복공(伏恭)5)을 대신하여 사공(司空)이 되었다. 몸가짐이 바르고 무거웠으므로 대신(大臣)의 절도를 갖추었다.



[영평 18년(75년)]


장제가 즉위했을 때 모융은 이전 조정의 이름난 신하로써 조희(趙憙)를 대신하여 태위(太尉)로 임명되었으며, 조희와 같이 참녹상서사(參錄尙書事)를 겸하게 했다.



건초(建初) 4년(79년)


세상을 떠났다. 장제가 친히 장례에 임했다. 마침 모융의 큰아들 모린(牟麟)이 고향 마을로 돌아가 있었는데, 장제는 나머지 아들들이 어리고 연약한 것을 보고 칙서를 내려 태위연사(太尉掾史)에게 그 장사 행렬[威儀]이 나아가고 멈출 때를 가르치게 했으며, 은총을 매우 두텁게 내려 보냈다. 또한 현절릉(顯節陵) 아래에 무덤 자리를 마련해 주었으며, 모린을 낭(郞)으로 제수했다.


1) 대하후는 이름이 승(勝)이며, 선제(宣帝) 때 사람이다.


2) 사도가 무재로 천거한 것이다. 풍현은 지금의 서주현(徐州縣)이다.


3) 『한관의(漢官儀)』에 따르면, “범천은 자가 자려(子廬)이며, 패현(沛縣) 사람이다.”


4) 하양(鮭陽)은 성이다. [하(鮭)는] 음이 호(胡)와 가(佳)의 반절이다.


5) 복공은 자가 숙제(叔齊)이며, 복담(伏湛)의 친형의 아들이다. 이에 대해서는 『동관기(東觀記)』에 나온다.





덧글

  • 마왕 2009/10/06 11:03 #

    [헌제기]를 옮기던 도중 이런저런 데를 뒤적이다가 짧은 김에 모두 옮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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